거리에는 빈 바람이 나뒹굴고
앙상한 겨울 면상은 외롭고 쓸쓸하도다.
차갑던 손 하나를 더 포갰더니 금세 따뜻함을 느끼는 걸 보면
올겨울은 유난히 길었던 것 같다.
겨울은 말없이 다가와 우리를 떨게 한다.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함에 나도 침묵하여야 하는가.
월출산의 빼어남은 천하의 으뜸이고
그 아래 호동(虎洞)마을 인심의 후덕함은 만대에 자랑거리라 하였거늘
산행을 마치고 마을회관 앞 너른 공터에 주차된 차 앞으로 걸어가는데
운전석 뒤쪽 펜더 도색이 벗겨져 있다. 적절한 표현은?
이곳 호동마을 호동골에 뻐꾸기가 목청 높여 울면
천하에 복사꽃이 만개한다는데
나는 그렇게 될 거라 믿는다.
범바위 능선 초입을 찾고자 동분서주하던 차에
아침 일찍 기찬묏길을 산책 중이던 마을 주민을 만났다.
범바위 초입을 물으니 월산사로 오르는 길을 알려 주신다.
그분이 알려준 곳은 들머리를 한참 벗어난 곳에 위치한 시루봉이다.
시루봉은 동릉 암릉릿지 사자봉을 칭하는데
이곳 호동마을 주민들은
시루를 엎어 놓은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마을 뒷산 높은 봉우리를 시루봉이라고 부른다.
산행 코스는 시루봉을 포함하여
범바위 능선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곳은 예정된 코스에서 벗어 났음을 알았고
육감을 이용해 방향을 다시 잡아 급선회 한다.
봄인 듯하더니 다시 추운 겨울이 왔다.
한 계절에 오래 머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줄 알지만,
떠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 겨울이 밉지는 않다.
그래도 바람 부는 날,
눈이 날리는 날,
때론 비에 젖는 날,
가끔 창가로 햇살 눈부신 날에
산이 나를 오라는데 아니 갈 수가 있겠나
산 아래 들녘은 점점 연둣빛 색이 짙어지고
자연에 순응하며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밀려오고 떠나감....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끝없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염치가 없다.
뒤돌아보면 봄이요
앞을 보면 아직 깊은 겨울이다.
이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겨울 산
나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
산을 오르고 있다.
구름에 덮인 하늘
저 아래 겨울 가뭄으로 말라 가는 상수원지를 보며
지난날을 떠올려 본다.
나는 지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웅장한 시루봉을 뒤로한 채
떠나지 않은 겨울 속으로 빠져든다.
들어갈수록
오를수록
현란한 바위와 암봉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범바위 능선은
한 편의 시가 있는 길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는 것처럼
모든 바위는 아름다움을 뽐낸다.
하늘 아래 구름이 바람을 타고 흐르면
흘러가는 구름따라 음악이 흐르리...
상상의 나래 속에 들어가는 자유로움이 있는 길.
앞을 보고 길을 가다가도 다시 뒤를 돌아보게 하는 길.
내가 바라본 산은
경이롭지만 외롭고 절망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다 한숨 크게 내쉬면
작은 숨소리조차 삼켜버리는 산
벼랑 끝은 아찔하고 무섭다.
마음의 벼랑만큼 아득할까...
응달진 산은 아직 겨울이다.
주지봉과 문필봉을 바라보는데
좌측 월각산에 마음이 가는 까닭은?
이제 그 선을 그어볼까...
늘 다니던 길이 눈으로 뒤덮여 버렸다.
할 수 없이 아래로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치고 올라오기를 수십여 분...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예상치 못했던 미끄러운 절벽 길을 만나면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앞으로 나아가며 오르내리길 몇 차례였던가
노적봉을 넘어 상견성암에 도착했지만
들어갈 수가 없다.
외부인 출입이 잦아 수행에 불편을 겪고 있어
출입을 통제한다는 스님 말에 미련없이 내려와야 했다.
사실 저 암자에 가고자 한 이유는
바위에 새겨 놓은 월출에 대한 예찬을 보고자 함이고
그 풍광과 비경이 빼어나기 때문이다.
‘1000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1만 개의 계곡은 호랑이들이 서로 다투는 듯하다.’는 뜻이 새겨진
‘천봉용수 만령쟁호(千峰龍秀 萬嶺爭虎)’란 글이 음각된 바위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하산 코스도 미왕재가 아닌 성견암에서 도갑사로 택했다.
깍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자리 잡은 상견성암.
저곳은 월출산 구정봉에 이어 두 번째로 기가 센 곳이며,
어지간한 사람은 하룻밤을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기운은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빼어난 풍경만 눈에 들어 온다.
도갑사에서 발행한 안내책자에는 상견성암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비경(秘境), 그리고 신비, 신선의 자리
한 번이라도 견성암을 다녀간 경험이 있는 불자나 관광객들은
그 풍광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은은한 달밤에 빛나는 산의 정취, 새벽녘 상서로운 하늘...
그것은 깨달음.견성見性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비,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명찰 도갑사의 12암자 중
동암과 함께 남아 있는 선승들의 수도처이며,
도선국사와 초의선사를 비롯, 하루 한 끼 식사를 하며 목숨을 건 수행과
무소유를 실천한 청화(靑華) 스님 등이 이 암자에서 수행했다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진정한 월출을 보는 것은 달밤이라고...
“음력 열사흗날에 상견성암 앞뜰에 서서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달을 보지 않고서는
월출산 달을 말하지 말라”
상견암에서 20여 분 내려오면
인적이 드문 탓에 자연관찰로의 대숲 길은 조용하고 좋다.
산을 깨우는 새소리, 대나무 부딪히는 소리
고요함은 오늘 풍경을 바라보던 육체의 노고를 보듬기 충분하다.
월출
다시 오르고
다시 가고 싶은 산
범바위 능선과 상견성암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는 행복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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