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은 겨울 산행의 백미로 손꼽힌다.
겨울 왕국, 설국, 겨울산행 일 번지 등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덕유
육십령을 시작으로 서봉, 남덕유, 삿갓재에서 황점마을까지
그날 무진장 걸었던 것 같은데 실제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눈 때문이었을까....
연속된 삶의 순간에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
시간이라는 일방적인 선택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야 하는가에 대해 골머리를 앓기도 하지만,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운무를 만나게 되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라도 하면
그간에 나를 괴롭혔던 무수히 많은 일들은
기억상실에 걸려 한순간 다 잊어버린다.
그 순간을 다시 찾고자 어둠을 뚫고
미끄러운 눈길을 걷는다.
나는 겨울을 만나러 간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지
산을 찾았던 여느 날과 같겠지만,
산을 오르는 그 맛의 익숙함을 맞이하러 간다.
익숙한 산길에는 설렘이 있고 기다림이 있어 좋다.
더구나 겨울의 한가운데로 발을 들여놓으니
가슴 떨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늘에서 뿌려대는 아침 볕
이마를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
여명을 밀어내는 낯익은 하늘빛 풍경들이
원래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을 정도로 티 없이 맑다.
조급한 마음을 앞세워 몸을 움직이면
나보다 먼저 눈이 앞서가 있고
눈꽃 세상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덕유 이곳에 내 발을 들여놓기까지는
너무 긴 기다림 들이었다.
아침 하늘이 궁금하였던지
멀리 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은
옅은 구름을 뚫고 올라와 밤사이 참았던 숨을 내뱉는다.
동으로는 가야산 최고봉인 상왕봉이 위용을 과시하듯
날카롭게 솟구쳐 있다.
먼 산 해가 뜨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가슴도 금방 뜨거워진다.
겨울은 아름다운 꿈이며 조용한 눈 맞춤이다.
오늘따라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답다.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다가도
발길이 머문 곳에 잠시 머물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었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이별은 아니었으면
그러나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더 아름답지 않았나 싶다.
산, 하늘, 바람, 구름, 눈...
그리고 사람..
서봉에 올라서니
기다랗게 펼쳐진 능선이 펼쳐진다.
마천루에 눈을 올려놓는다.
쿨하고 멋지다.
머물고 싶지만
이렇게 좋은 날인 만큼
서둘러 가야 한다.
눈부신 아침 햇살도
곧 지나갈 시간이지만,
아직은 선명히 멀어져 가는 태양빛을 보며
당신의 모습을
나의 모습을
기억에 담는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을 찾아가 품에 안기고 싶다...
그래서 이곳에 또 왔는지 모른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이미 와있는 몸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에는
당신의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
하늘이 있는 곳
저 파랑의 세계로 솟구치는 신의 세계...
능선 끝자락 희미하게 보이는 육십령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길을 걸어왔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서봉에 이를 때까지
거친 숨을 얼마나 몰아 쉬었는지 몰라.
가지런히 부는 바람은
빈가지에 내려앉았고
고요한 햇살도
하얀 눈과 함께
봄날처럼 빛이 난다.
잠시도 머물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숲길을 걸어 갈 때
나를 끌어당기는 12월의 하늘은
거친 숨소리를 잠재운다.
산과 하늘
모두가 바다색에 물들어 간다.
나는 그 안에 있고
햇살까지 봄볕처럼
살가운 날이다.
가끔은 바람이 불었다.
끊이지 않고
물결이 일어나 눈이 흩날릴 때
차가운 바람의 발길을
선뜻 따라갔다.
가끔은
쉼없이 불어대던 바람도
쉬어가며 숨을 고르고
나뭇가지 사이를 비추는 햇살까지
포근함으로 다가온다.
덕유는 지난 며칠 동안
동장군과 함박눈에 시달렸나 보다
나뭇가지마다 길게 늘어진 눈꽃은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고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바닷물은
마음을 적시고야 만다.
하늘을 올려 보다가도
감은 눈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들어오는 밝은 빛에
살포시 고개를 떨구게 하는구나!
파란 하늘은
깊고 넓은 바다와 같고
하얀 눈꽃 송이의 화려한 절경에
눈과 마음마저 시린 날.
한겨울 포근한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온종일 눈길을 걸었다.
길 따라가는 길
산새는 놀다가 어디로 갔는지
꽃향기 가득할 때 다시 오려나
바람 소리 발소리만
산을 깨운다.
가끔 산을 오른 날엔
서러운 마음 가슴 밑바닥에 남아
울컥 꿀꺽...
통곡하고 싶다.
무심한지고
바람이 일어 구름 띄우니
내 마음도 별수가 없다.
겨울 하늘은 차갑다.
밤새 내린 눈에 덮인 저 풍경들은
순백으로 순결하지만,
쌀쌀함에 코끝이 시큰하다.
설산의 눈꽃을 바라보며 앞서 걸었더니
내 발자취는 지워지고
여유로움도 없이 설국에 들어선 그대들..
환희의 바랑 맨 그대들이여
다시 그 길을 이어보자꾸나
향적봉이여~
설천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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