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이면서 정체를 알 수 없이 휘몰아치는 그리움의 대상인 지리산. 여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람이 보인다. 도대체 천왕의 일출이 무엇이길래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애타게 만드는가. 천왕은 왜 우리를 쉴새 없이 불러 들이는 것인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먼저 도착 해 있는 산님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려나. 태양이 솟아 오르고 한참 지난 뒤에도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는지 연하봉의 비탈지고 나지막한 바위에 올라 제석봉 넘어 천왕을 바라보며 남몰래 눈물 훔치는 나는 바보인가.... 이것으로 너와의 만남이 마지막은 되지 말았으면, 그리고 늘 첫 만남이었으면 하는 간절함들... 그동안 나를 옭아맸던 동아줄을 풀어내고 그곳에 홀가분하게 내려 놓고 왔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언제 떠나 보리라 다짐 했던 곳. 그래서 아픈 허리통증도 잊은채 걸어야 했던 길. 발로 더듬어 마루금을 걷는 동안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토해냈던 하루. 그날은 소중하고 값지다.
16일 저녁 8시 목포를 벗어나 어둠을 줄기차게 달려왔음에도 대원사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은 12시다. 대원사와의 인연은 지난 화대종주를 홀로 나선 뒤로 2년 만이다. 그때 치밭목대피소에서 이곳 대원사까지 내려오는 동안 분명 다시는 오지 말자고 스스로 위안을 주며 다짐 했던 곳인데 지금 대원사 앞 유평계곡의 우렁찬 물소리를 다시 듣고 있다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칠흑같은 어둠, 물소리, 하늘에 뿌려진 소금별 하나, 소금별 둘...셋.... 하~~~~~!! 찬란한 밤이다.
이번 산행은 대원사를 시작으로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25.5km을 걸어 화엄사로 내려가기로 한 도상거리 48km, 15시간을 목표로 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21시간이라는 긴 여정이 되버리고 말았다. 저 고갯을 넘어 다시 한고개 길만 넘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내려 올 수 있음에도 계속되는 더딘 걸음에 결국 천왕의 일출을 보지 못한 채 날은 밝아 오고야 만다.
그간의 부질 없는 욕심과 투정을 이곳 지리까지 가져온 까닭은 응어리진 마음을 떨쳐내고 고스란히 내려 놓기 위함이다. 어느 누가 가슴 속의 터진 상처를 달랠 수 있겠는가. 쉽게 삭이지 못하는 마음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갈지언정, 지리는 내게 다시는 아프지 말며 욕심 부리지 말라 한다.
붉은 태양은 왜 이리 중봉에서 쓰디 쓴 여운을 남기고 말았는가. 무거운 짐을 짊어 지고 가는 고달픈 인생길 마냥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또한 인생인가 보다. 천왕봉과 몇 분의 시간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중봉에서 하루를 맞이한다.
삶이란,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바람 같은 덧없는 존재라지만,
지금까지 너에게 오면서 나는 너를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첫 순간에 가슴은 떨려오고 내 텅빈 가슴을 가득 채워 주었던 첫 만남이 아직까지 그립다.
아무말이 없다. 일출을 바라보는 동안 새벽의 찬바람이 불어대는 것도 잠시 잊는다. 험난한 세월에도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주목처럼 오늘은 잠시 시간을 잊고 저 붉은 태양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한 없이 이곳에 머물고만 싶어라. 서 있는 것도 잠시, 싸늘한 바람에 땀은 한 순간 식어버리고 오월이 무색할 정도로 얼어버린 산길은 흙과 얼음이 서로 뒤엉켜 솟구쳐 있다. 새벽에 불어대는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바람을 피해 봉석형님과 나란히 바위틈에 앉아 일출을 감상한다.
중봉 아래에서 바라본 황금능선은 녹음과 함께 파도를 치듯 밀려온다.
파릇한 생명들...
계절이 바뀌면서 생명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그래서 삶은 놀라운 만큼 깊고도 넓은 그 무엇인가 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중봉에서 천왕을 오르는 동안, 아니 이곳에서 천왕을 보는 순간부터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이리 저리 둘러봐도 온통 산이고 능선이며 하늘이다. 해는 분명 동으로 떠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지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살아온 날들과 같이 아직 가야할 미답의 시간들
분명한 것은 내 몸뚱이는 시간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원사에서 화엄사까지 빨간 선을 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 힘든 순간은 같았으리라.
멋진 연하선경을 같이 걸었던 권희영, 김봉석, 강남곤, 김정규, 최정석, 그리고 김은종 산님들... 감사합니다.
제석봉에서 촛대봉으로 가는 중 아침을 장터목에서 먹는다.
제석봉에서 바라본 지리...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의 주목..
비록 재앙으로 그 삶을 채우지 못 했지만,
지금 서 있는 자태는 천년의 시간 만큼이나 충분하다.
붉은 꽃이 다 저버렸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철쭉이 피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눈시울 붉히도록 아름다운 연하선경을 걸어간다는 것....
멈추면 보인다 하지만,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살아온 날들과 아직 가야할 미답의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내 몸뚱이는 시간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살아가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데,
심장이 뛰는 것과 내가 살아 있음을 이곳 연하선경에서 매번 느끼게 된다.
나의 연하선경은 그러한 곳이다.
아침은 생명을 불어 넣는다. 넘치고 새로워 그 빛깔 또한 곱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은 아니지만 구름에 살짝 가리워진 하늘,
선선한 바람과 흐르는 구름이 있어 좋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어 더 없이 좋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천왕봉과
세석평전의 모습
멀리 반야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넘어 노고단을 가야할 터인데 까마득하다.....
골이 참 깊다.....
낮은 곳처럼 보이지만 지금 서 있는 곳도 해발 1,200m 이상이다.
5월 16일, 지리산 녹음이다.
끝없는 능선과 깊은 골
당초 계획은 이곳 연하천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으나,
시간이 많이 지연 되다 보니 장터목에서 간단한 식사로 허기진 배를 해결한다.
삼도봉이 이르니 해는 기울고 그림자는 길어진다.
삼도봉에서 바라본 노고단
아직 가야할 길은 멀지만 그래도 밝음이 있을 무렵 저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좋다.
지리에 들면 산행 시작이 어둠이었고
태양 아래 노고단 모습은 첫 만남이니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풍경인지라 더 없이 포근하고 좋다.
반야봉에서 바라본 저녁노을은 또 어떤 풍경일까 심히 궁금하도다.
21시간의 산행...
참 많은 시간동안 산에 있었고
산님들과 함께 걸으면서 얼굴 표정과 몸짓, 걸음걸이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담아왔다.
늘 그리운 지리
행복했다고 말한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온 날
삼도봉에서 바라본 노고단이 첫 만남이었던 것처럼
새롭고 새롭다.
이 글을 보실지 모르지만,
대원사에서 성삼재까지 함께 하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해 드립니다.
20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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