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초록의 빛깔로 눈이 호강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봄의 기다림은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파리들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마음까지 연하게 하는 시나브로 봄의 마력이 찾아온 것이다. 햇살이 톡톡 튀어 가슴에 묵혀둔 봄이 다시 찾아오던 날. 목련과 매화가 겨울담을 넘어 고개를 내밀고 가지런히 도로변에 줄지어선 벗나무 꽃봉우리도 튀밥처럼 여간 탐스럽다. 지난해 덕룡산을 아름답에 수놓았던 진달래가 잊혀지지 않아 다시 이곳을 찾았지만 만개하려면 아직 2주는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암릉을 오르내리는 동안 봄은 옴싹달싹 못하게 바람을 가두고 햇볕을 쏘아 붙여 양지바른 곳에 진달래꽃 화사하게 피워내니 실망스러울뻔한 봄산행에 가끔 힘을 실어 주기도 한다.

 

 

산행 들머리 소석문은 산내음으로 가득하다. 무심코 지나쳤던 마른 숲 어디선가 코끝 찡하도록 진한 향기를 뿜어내지만 그 정체는 알 길이 없다. 봄은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산에서 나뒹굴며 꽃을 터트리니 그 모습 또한 즐겁도다. 한낮의 기온이 20도를 넘어선 오늘은 나른한 기운에 어딘가에 기대고 드러눕고 싶었다. 마른 잔디어도 좋고 푸른 풀밭이어도 좋다.

 

 

덕룡은 내륙에서 바다로 향하는 한마리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멀리 탐진강 아홉 골의 물길이 합쳐진다 해서 붙혀진 강진만의 구강포와 마주하고 있으며 만덕산 옥련사를 시작으로 해남의 두륜산을 넘어 달마산까지 이어진다. 서봉에 올라서면 덕룡의 진가를 확인 수 있는데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능선의 기이한 형상과 그 위용은 매력적이며 봄철 진달래와 더불어 암릉산행이 일품인지라 산을 좋아하는 상춘객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바위틈에 끼어 아직 겨울잠에서 덜 깨어있는 진달래를 어루만지다가 허공을 가르며 넘어야 할 덕룡의 능선을 주시한 채 산중에 홀로 앉아 봄꽃 흐드러지게 핀 덕룡의 여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이른 봄..... 나는 나만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덕룡의 봄을 기다렸던 것이니.. 덕룡이여 어서 피어 오르거라..

 

 

 

 

 

 

 

마른 것들을 깨우기 위한 봄의 움직임은 쓸쓸하지만 힘이 있다. 맑고 파란 하늘을 기다렸거늘 하늘은 뿌옇다. 덕룡을 바라보았던 그 시간들은 눈물겹도록 고마웠고 따뜻한 마음속 깊이 묵여있는 그리움으로 남았다. 저 홀로 바라보며 쓸쓸해지던 그날의 마음에도 아침의 하늘처럼 뿌옇고 낯설어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 또한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날들로 채워져 가길 바랄뿐이다.  

 

 

강진으로 파고드는 바닷물... 밀려왔다 다시 먼 바다로 밀려가기를 하루 두번...누구에게나 바다는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고 아픈곳을 도려내는 치유의 바다일 것이다. 계곡 사이로 보이는 작고 희미한 바다지만 바닷가에 서면 나는 좋다. 아무 말이다 털어놔서 좋고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이야기를 털어 놓는 동안 벌써 봉우리 몇 개를 넘었는지 모른다. 이제 마지막 2개의 고개를 남겨두고 있다. 이곳과 다음 코스를 넘어서면 덕룡의 암릉산행을 마치게 된다.  

 

 

 

 

 

 

 

 

오늘 3명은 무한으로 한가로운 날.... 당초 덕룡봉을 지나 하산키로 했는데 <불나방>님의 막내 아들이 아프다는 다급한 전화가 와서 덕룡봉을 거치지 않고 수양마을로 내려서기로 한다. 그 길에는 봄이 움츠리고 앉아 있어 볕은 더 없이 따사롭더라......

성큼 다가온 봄기운에 산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 봄볕이 좋은 오늘 덕룡산으로 내달렸다. 한 겨울에서 깨어난 듯 목장의 풀들도 깨어나고 숲속의 새들과 새순돋는 나무들과도 인사를 건낸 하루, 노란 개나리 마냥 꽃을 피운 생강나무는 여기저기 동그란 새싹의 꽃망울을 터트려 봄기운 안겨다 주었으니 봄기운 만연한 자연에 대해 그저 감사할 따름이고 내면의 다스림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멋드러진 하루가 아니었다 싶다.

 

 

 

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울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장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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