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사색공감

빗속을 걸으며

별 사 탕 2017. 4. 25. 12:32







그 해 가을은 유난히 맑은 날이 많았다.

여름부터 건조했던 날씨 탓인지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엔

온종일 비가 내렸고 후두둑 빗소리에 마른잎들 날려

아파트 화단에 가을꽃들이 수채화 같이 곱게 피었다.

가을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비라고 탓할 순 없지만

다음을 위해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이었던가.... 


연휴의 끝자락 그날 오전

침대 머리맡에 울리던 전화벨 소리에

읽다가 만 책을 덮고 전화기를 들었다.

"가을비 내리는 날 가을 길 걸으러 가자."


귀에 익은 목소리에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어디로 갈까?"


그는 비 내리는 숲길을 걷고 싶어 했다.

기억을 뒤지다 우연이 찾아냈던 백련사(白蓮寺) 가는 길


나락이 실하게 여물어갈 때쯤

한반도에서 일조량이 가장 풍부하다는

강진만 구강포의 진한 하늘빛은 없었지만,

그해 가을 길은 여느 들판처럼 풍요로웠다.


강진 구강포에는 온종일 비가 내렸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나무뿌리에 발이 미끌려 넘어지면서

손바닥의 두툼한 살점 하나가 떨어져 나가버렸다.

우산 안으로 들어오는 눅눅하고 습한 공기와

맑고 청초하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데 어울려

마음을 가라앉힌다.

꽃은 활짝 피었고 가을 향이 은은하다.

누구에게나 향기가 있지

나에게서는 어떤 향이 날까?

이 순간 분에 넘치는 사치는 아닐 테지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도 벗어 버렸다

마하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존재는 드러나고 탐욕의 불은 꺼져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숫타니파타-



안개에 뒤덮인 백련사

시간은 키 작은 잡목 속에 숨어서 숨을 쉬었고

끝없이 내뿜는 고혹적인 풍경에 취해 고통도 잊는다.

그는 먼저 알았던 걸까!


걷다가 사라지고 싶은 길
숨소리조차 가만가만

그래야만 될 것 같은,
낯선 길에 들어서면 말은 숨어버린다.

이 모두가 위로가 되고 소중한 나날이 사라져가는 것을

우리는 가슴 움켜쥐고 기꺼이 지켜보아야 한다.

다산초당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서로는 아무말이 없었다.

이제 그에게

건강하게 잘 있냐고 안부를 뭍는다.

그 여백엔

못했던 말들 마음 적어 보내니

네도 마음으로 보이거든

아무렇게나 읽어내려라

쓰고 또 써내려도 끝없는 사연을

어찌 그때 그 마음 그려낼 수 있을까!


빗속을 걸었던 그해 가을은

한없이 맑고 향기로웠다

훗날 그렇게 돌아보며

오늘을 추억할 테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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