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는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보아도
나의 고독함이나 쓸쓸함엔 기원이 없다.
쓸쓸한 삶의 관조로 뒤덮인 조그마한 대합실과 비슷한 현실에서
나는 조용히 미쳐가고 있다.
소리 없이 몸부림친다.
그리고는 울컥 울음이 터졌다.
이전과 이후의 차고 단단한 삶의 벽을 허물고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나,
그것은 결코 추하지 않은 고결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랜 침묵을 깨고
밤 열차를 타고 떠나면 되는 것이라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고 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잠시 쉬어가는 간이역...
모든 것을 내려놓는 종착역...
운명의 대합실에서 오늘도 열차를 기다린다.
번잡하고 어지러운 온갖 것들로부터 해방을 맞으며
마지막 눈물로 호명해야 할 이름 하나 있다면
나는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하얀 눈밭을 걷다 선체로 돌이 된 채
이름 하나 부르다 죽는다 하여도
그 열차를 타고 떠나고 싶다.
저기 저만큼 서 있는 내 삶은 고결하다.
고향이라는 어휘는 이제 전혀 낯설지 않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이 돼버렸나 보다
나는 가끔 마지막 밤 열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꿈을 꾼다.
사라진 어느 역 대합실에서
눈물로 호명하는 마지막 이름 하나를 입에 담고서.....
'휴식창고 >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산다는 것 / 박경리 (0) | 2017.10.31 |
|---|---|
| 눈물 / 피천득 (0) | 2017.03.23 |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0) | 2016.09.27 |
| 길 / 윤동주 [지리산 한신지곡 트레킹 2016.08.20] (0) | 2016.08.22 |
| 소의 말 / 이중섭 (0) | 2016.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