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창고/詩 모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별 사 탕 2016. 9. 27. 13:2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미혹이 많으니 불혹이라 하고

하늘의 뜻이 어려우니 지천명이라 했으리라.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불혹의 정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판단력은 많이 흐려진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가끔 읽는 시 한 편에 위안할 뿐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구석진 자리에 놓인 낡은 슬리퍼 한 짝처럼

그리움만 먼지로 쌓여가는 동안에도

나는 나이를 또 먹는다.

비 오는 날 저녁 마른 흙냄새 날리듯

습하면서 건조한 공기 사이를 비집고

나는 눈먼 장님처럼

낯선 어디론가 먼 여행을 홀로 떠나고 싶어졌다.

가을을 탓하고 싶지 않다.


선선히 불어오는 한 줌의 가을바람은

긴긴 그리움의 여행으로 이끌고

밟아온 지난날의 회상 속

어둡고 텅 빈 방 안 한 모퉁이에서

속내를 토해내고야 만다.


어디선가 바스락대며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다 겨울이 곧 올 것 같고

눈발 날리는 겨울이 그립지만

발 시리다고 동동 구르기 싫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 가을볕 위에서

마음이 온전히 가벼워지고 싶다.

가을을 천천히 불러야겠다.

금세 뒤도 안 돌아보고

또 떠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