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감과 공감
의자에 둘러앉아 마주보는 시선에 따라
익숙한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조금은 낯선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채마밭을 지나 이곳 불일암 돌계단을 올라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의자이다.
법정 스님의 의자는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불일암 맞은편 후박나무를 바라보며
조계산 솔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를 듣고 있었다.
설명절 마지막 날이었던가...
지난 겨울 홀로 산길을 걸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이어지는 겨울 숲을 걸으며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았고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걸으며
나를 찾고 싶었다.
오늘은 그날 가보지 못했던 그 길에 들어선다.
무소유...
그가 남기고 간 삶의 발자국을 따라
불일암으로 향하는 이 숲은 유쾌하다.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위해
때론 내가 가진 것을 버려야 함을 깨우치게 하는 길
소유의 골방에 갇혀 빠져나오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이곳은 그 어떤 고민과 연민도
내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은
단순함과 간소함에 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찬바람 불어 쓸쓸한 산책길
짙게 깔린 낙엽을 바라보며
스스로 살아온 날들과
내가 걸어왔던 하루의 노고를 위로한다.
가슴은 텅 비었지만,
아무것도 그립지 않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또 한해가 떠나고 있다.
아침을 달려 이곳에 이르렀다.
낯선 곳에서 왠지 모를 익숙한 향기를 느낀다.
조금 전까지 내가 아는 누군가가 여기 머물렀던 것 같다.
묘한 기분이 들어 낙엽을 건드려 보고
길섶의 대나무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당신도 그랬을까..
바람에 하늘거리는 대나무 꼭대기
그 모습도 꼭 그를 닮았는지 모른다.
불일암으로 향하는 사립문은 단순하면서 간결하다.
대숲에 어둠의 길을 뚫고 들어서면
밝고 환한 세상을 만나게 된다.
길을 걷고 생각하며 고뇌한다.
저 밝음을 향하는 발걸음은
넓은 마음과 포용의 세상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며 희망이다.
법정(法頂, 속명) 본명 박재철(朴在喆),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이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널리 전파해 왔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 서울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하였다.
1932년 11월 5일(음력 10월 8일), 전남 해남군 우수영(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 였던 목포상업중학교에 진학했고 이후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여 3년을 수료하였다. 그는 당시에 일어난 한국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3학년때인 1954년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나기로 했던 그는 눈길로 인해 차가 막혀 당시 서울 안국동에 있던 효봉 스님을 만나게 된다. 효봉 스님과 대화를 나눈 그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해에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위키백과-
산새 지저귀는 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
당신이 걸었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요히 걸어갔을 낙엽 쌓인 무소유 길을 걷는다.
사람들은 힘들고 지칠 때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를 찾게 되고
안락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삶이 춥고 인생이 공허할 때 따뜻한 마음으로
덮어줄 그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유골을 평소 아끼던 후박나무 아래에 고이 모셨다.
법정 스님이 불일암에 와서 직접 만든 의자이다.
어떠한 형식도 갖추지 않고 소탈하면서 검소한 삶을 몸소 실천했던 사람...
이제 사람은 떠나고 없는 쓸쓸한 의자 위에는 방명록과
책갈피가 놓여 있다.
찔레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뻐꾸기가 자지러기게 울 때면 날이 가문다.
어제 해 질 녘에는 채소밭에 샘물을 길어다 뿌려 주었다.
자라 오른 상추와 아욱과 쑥갓을 뜯어만 먹기가 미안하다.
사람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갖가지 음료수를 들이키면서
목말라하는 채소를 보고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채소밭에는 생기가 감돌았다.
그 생기는 보살핌에 대한 응답이다.
-법정 스님 수상집<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낙엽 수북이 쌓인 길
마른 잎사귀라 발밑의 감촉이 폭신하던 무소유길
대숲을 스치는 찬바람이 나를 훑으며 지나가도
나는 따스한 무언가에 이끌려 속삭이고 있다.
시간에 쫓기는 삶,
화려한 계절은 떠나고
곧 시린 겨울이 온다 할지라도
행복했던 모든 순간은 문득 떠올려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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