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곳/산책길

잘 가라 가을아...[지리산 뱀사골과 피아골]

별 사 탕 2016. 11. 17. 12:57



지리산 와운마을 천년송

노을빛이 살포시 스미는 산기슭에 새빨간 단풍나무 하나 온몸을 불사르며 정열로 예쁘게 피어났던 어느 해를 떠올리며 찾아간 와운마을. 아직 저물지 않은 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을 거란 작은 기대를 안고 지리산 뱀사골과 피아골로 무작정 향했다. 지리산 뱀사골 와운마을 가는 길은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 산길도 아니오, 원시림 칠선계곡처럼 깊은 골도 아니다. 뱀사골을 따라 오르면 고즈넉한 풍경 속 산골 마을이 나타나는데 마을 뒤편 높은 언덕 위에는 이 마을의 상징인 '할머니 나무'라 불리는 오백 년 된 소나무가 우직하게 서 있다. 티 없이 맑은 청류가 흐르고 피로해진 마음 편안함으로 채우는 뱀사골,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온통 울긋불긋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가을이었을 텐데 듬성듬성 늦장 부리던 단풍들만이 간간히 눈에 들어와 깊어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내심 기대하며 갔던 뱀사골인데 이렇게 빨리 절정에서 벗어나 가을을 떠나 보내고 있었다니 아쉬움이 크다. 산들대는 바람과 가을의 정취를 맛보는 행복한 여행길에는 보드라운 햇살이 따른다. 



옷을 벗은 지리산의 숲

와운교 오룡대 갈림길에서 화개재로 가려면 뱀사골 산길을 따라 3시간 이상 올라야 하지만 옆으로는 맑고 청아한 계곡 물소리와 계절이 만들어내는 늦가을의 정취가 좋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라본 지리 능선과 두 손 뻗치면 닿을 듯 선명한 반야봉 주변의 숲은 이미 옷을 벗고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짙푸르던 옷을 고운 옷으로 갈아입고는 어느새 그것도 구차하여 바람에 날려 버린 것이다. 거짓 없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만추(晩秋)의 숲은 을씨년스럽게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잔가지가 춤을 추고 있었으니 떠나가는 가을이라 할지라도 한 조각 남은 그 가을 속게 내가  깊숙이 들어가 있었으니 그리 싫은 것만은 아니다.




뱀사골의 유래

뱀사골은 이름 그대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1,300여 년 전 송림사라는 절에 해마다 칠석날이면 스님이 신선이 된다며 산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게 되자 한 고승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주변 사람에게 알아보니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뱀사골에 살고 있던 거대한 이무기에게 산 채로 제물이 됐던 사실을 알게 된다. 고승은 그해에 제물로 뽑힌 스님의 옷에 독을 묻혀 산으로 올려보냈고 다음 날 선인대에 올라가 보니 이무기가 승려를 삼키지 못하고 죽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무기가 죽은 골짜기라는 뜻의 뱀사골이 됐다는 것이다. 뱀사골 들머리 마을은 뱀에게 잡혀먹혀서 온전하게 신선이 되지 못하고 반만 신선이 됐다 하여 반선(半仙)마을이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와운마을의 풍경

평평한 나무판을 깔고 페인트칠을 한지 얼되지 않아 화학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와운교를 지나 오르막을 살짝 치고 오르면 정이품송 못지 않은 천년송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구름이 누워서 간다는 와운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펜션과 찻집이 대부분인 것 같고 일반 주민이 거주하는 가옥을 합하여 10가구가 채 안되는 마을에도 개발붐을 탔는지 이곳저곳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최근 유명세를 타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아 어린아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다. 조용한 마을에 노래가 크게 들려오고 외지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로 마을이 시끄럽다. 시대에 맞춰 현대화로 탈바꿈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만, 예전 조용했을 산골 마을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지금의 변모하는 풍경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숲의 언어는 이해하기 힘든 조금은 난해한 면이 있다.

어떤 그리움인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오면 비워짐을 다시 채워내고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곧바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려준다.

그 언어는 바람.. 숲... 그리고 내면의 울림이다.

그 안을 몰래 들여다 보며 훔쳐보는 나

그래...

난 정말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피아골의 사랑
조선 시대 유학자 조식 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식 선행의 말처럼 지금 피아골은 핏빛보다 붉은 단풍이 절정이다. 865번 국도를 따라 연곡사까지 이어진 단풍 길은 화려하게 물든 만추(晩秋)이며, 황홀경은 극에 달해 오가는 상추객의 발길을 세우며 마음을 빼앗고 있다. 연곡사 작은 산사(山寺)의 뜰에는 꽃 잔치 중이다. 너른 마당에 핀 노란 국화꽃은 나로 하여금 발을 들여놓게 하였고 돈을 들였는지 새로 지은 건물과 새로 치장한 단청은 오래된 사찰답지 않아서 정감은 없고 화려한 색채에 눈이 어지러워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연곡사는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土地)에서 우관스님과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최 참판 댁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윤 씨 부인은 연곡사에서 우관스님의 동생과의 원치 않는 관계를 갖고 환이를 낳게 된다. 친자식과 벌이게 되는 환이와의 신경전은 사태를 관망하던 윤 씨 부인의 피를 말리게 한다. 최치수는 강포수를 앞세워 환이와의 쫓고 쫓기던 실랑이를 벌이던 중 결국 김 평산에 의해 살해되고 비운의 삶을 살다 간다... 물론 소설이지만, 그때 하동의 악양 들판과 하늘, 섬진강 물결도 지금처럼 예쁘게 가을을 맞이했을 거로 그려본다.



직전마을과 마지막 단풍

붉은 단풍으로 산도 붉고(山紅) 계곡에 흐르는 물도 붉게 비치며(水紅), 산홍과 수홍으로 사람도 붉게 물든다(人紅)하여 피아골은 삼홍(三紅)의 명소로 일컬어 왔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겨울을 준비하는 것일까. 햇살은 가늘고 엷다. 산 위에 잠깐 걸터 앉더니 어둠이 내리고 숲 속은 한층 적막하다.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가을을 보내야 할 때이다.

미련 없이 편안하게….

이제 탈 것조차 없는 앙상한 가지에

잿빛 여운만 남아 버렸고

화사하던 구절초도 금세 시들어

단풍잎은 대지를 덮을 것이다.

다시 하얀 눈이 이불 되어

포근하게 덮어 주리라

잘 가거라 가을아

이왕 떠나갈 길이라면

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말라

 단풍 이파리 끄트머리에 달린

한 조각 붉은 자존심처럼?

아름다움과 수많은 사연을 남기고

불처럼 타올랐던 너의 모습….

정말 너는 장관이었고 황홀했다

뜨거운 불씨를 품고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다음 가을을 손꼽아 기다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