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이 자비롭다.

구정봉 아래에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바위가 있는데

위태위태하게 홀로 서 있는 바위가 부처를 닮았다 하여

누군가는 그 바위를 부처 바위라 불렀다. 

그 모습이 그렇게 고독해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상견성암 양지바른 뜰에 들어섰을 때 깨닫는다.

오늘이 바로 사월초파일 그날이었음을....

마땅히 시주할 게 없는데도

상견성암을 지키는 스님의 넓은 마음을 받아들이고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에 하루의 피곤을 씻어낸다.

작은 것이지만 

앞마당에 넓게 펼쳐진 산그리메 보다 더 인자하다.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자비로운 날

잠깐의 시간 동안 짧은 생각을 토해낸다.



아카시아 꽃향기에 마음 젖는 고요한 아침

새들의 합창에 하루가 열리고

우리는 마음을 치유하러 숲으로 들어간다.

속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아픔의 시작이고

태어나서 늙게 되는 것 또한 아픔이다.

살아가면서 병이 들면 아픔을 뼈저리게 깨닫지만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언젠가 삶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부단히 애쓰지 않아도

가을의 마른 바람 스며들 듯 이미 몸이 반응한다.




저 넘어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는 이별의 아픔을 반복한다.

만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고통도 영원할 것 같지만,

그러한 순간은 잠깐 아니겠는가

살아 있음으로 누리는 행복이 크기 때문에

그 어떤 이별도 견딜만 하다.



빛은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만든다.

때로는 찬란한 빛 보다는 

소리없이 우는 어둠이 좋을 때가 있지만,



나는 아침을 깨우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좋아한다.



어둡고 매마른 것을 날려 버리고

초여름 파릇한 생명력 넘치는 녹음이 찾아왔다.

아침 볕의 따스함 때문인지 

계절의 순환은 무력한 나를 일깨워 준다.



큰골에서 좌측 안개골로 진입한다.

이곳에서 약5km 정도의 계곡을 치고 오르면

구정봉 아래 바람재 갈림길이 나오는데

안개골 일부 구간은 지리산 한신지곡을 연상케 하였던지

수량이 풍부한 여름에

이곳에서 물을 거슬러 계곡치기 할 것을 내게 권유한다.

할까 말까... 



큰골 합수부에서 안개골 방향으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구정봉 좌능이 시작되는데

 이 능선을 치고 오를 때

눈에 들어오는 수려한 경치는

 정말 일품이다.



바람을 등지며 산을 바라본다.

산짐승 발자국을 따라 오르기도 하고

길이 끊기면 돌아간다.

그러다 조망이 한 번씩 터지기라도 하면

기대 이상으로 가슴이 후련하다.



이곳은 바람이 거칠어서 제대로 서 있질 못하겠다.

바람재를 넘어 오는 바람 때문인가

감미로운 바람이라면 넋을 놓고 바라봤을 텐데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연분홍 철쭉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벼랑에 피어 나를 유혹하는 건가?



늘 갈등은 존재하고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선과 악의 분열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처는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는

보리수 밑에 앉아 고뇌하고

열반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하는데

나는 돌부처를 찾겠다고 산을 오르고 있으니....



드디어 만났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이 덧없이 변한다.

변화만이 유일하다고 하지만

저 부처는 가끔 세월을 잊어버리진 않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오래될수록 믿음을 지키고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모습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



마른 가지에 새순 돋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싱그러운 초록의 향연이 시작 됐음을 코끝으로 느낀다.



우거진 숲을 뚫고 막바지 고래바위를 오른다.

뒤로는 산행 시작점 대동제 저수지와

풍요로운 영암 들녘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희끄무레하다. 



이 바위를 올라서면 능선 우능과 합류한다.

거대한 바위 모양새를 살펴보면

누구를 지칭하는 손가락 바위 같기도 하고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흰수염 고래처럼 생겼다.



산벚이 만개할 무렵 찾아올까 했는데

그래도 가을바람 불어오기 전에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북릉에서 이어진 천황봉 정상도 제법 가깝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들...

처음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

그 생각들을 자꾸 꺼낸다.

길을 가다 막히면 돌아가고

일이 잘못되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목적지를 향해 가던 길에서

 왔던 길로 잠시 다시 돌아가지만

후퇴는 말자.



용암사지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의 모습....

부처님 오신 날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눈에 보이는 것마다 부처로 가득하다.

샛길과 굽은 길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칠흑같은 어둠도 초 한 자루면 세상이 밝아지듯

이제 조용하고 한적한 산길로 들어선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향로봉 정상과 능선의 기암

그리고 파란 하늘

긴 말 늘어놓지 않아도

침묵은 다르다.



구정봉에서는

바람에 옷깃이 나부끼고

어깨가 남루해진다.

해가 기울어 색이 바래고

마음의 휴식도 필요하다. 



검은 아스팔트 도로와 삭막한 도시와는 대조적으로

아직 시들지 않은 꽃이 있어 말초 신경이 숨을 쉰다.



영혼의 미영[明]을 깨우는 깨달음의 조건은 무엇인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인가



상견성암으로 가는 길의 육중한 암봉




이곳 암자는 거대한 바위 위에 축대를 쌓고 흙을 다졌다고 한다. 

상견성암의 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병풍역활을 하고 있는 신장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수려한 경관과 함께 자리한 기도터

신선대 위에서 바라본 월출...

깨달음의 조건은

터인가 마음인가


천봉용수 만령쟁호(千峰龍秀 萬嶺爭虎)

천개의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는 용과 같고

만개의 계곡은 호랑이들이 서로 다투는 듯 하다.



음력 열 사흩날에 견성암 앞뜰에 서서

산등성이 너머로 떠오르는 달을 보지 않고서는

월출산 달을 말하지 말라 한다. 

달빛 부서져 흩어져 내리는 날에

동백나무숲과 대숲을 지나

달빛을 밟고 올라 보리라.

그리고 능선 너머로 이어진

두륜산 노승봉 산마루를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보리라.



매일 똑같은 시간 변하지 않은 세상

하늘을 올려다보면 태양이 쏘는 빛에

울컥할까봐 땅만 보며 걷는다.

그리고 가끔 하늘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귀를 열고 눈을 감는다.

변하지 않는 세상 그 환경에

내 마음마저 그대로일까 봐

눈을 감고 걷는다.

바람이 불면 스치는 바람에

할퀴어 고통 받을까 봐

차라리 귀를 닫아야 할까.

대숲의 흔들거림,

두껍게 깔린 낙엽을 밟으며

맑은 마음으로 상견성암을 뒤로한다.

부처님 오신 날에 따스한 커피믹스 한 잔

후한 대접을 받고도

우리의 작별 인사는 예사롭고 간결했다.

그러나 떠나는 걸음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달밤에 또 찾을 테니까

암자와 한몸이 되어 살아가는 선승

그 누구도 아닌 나...

부처가 돼가는가 보다.

오늘도 그 선승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마음

떨쳐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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