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스님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저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
한 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
- 최치원 -
봄이 되면 하얗게 물들이는 매화향의 꽃구름은
이곳 하동과 광양 섬진강 산비탈에도 그윽하게 퍼리지라.
계절이 바뀌니 하동 악양의 강물도 깊어간다.
심정마을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하늘길은 섬진강에서부터
화개마을 화개천을 거슬러 산중턱까지
몇 가구 되지 않은 마을 돌담까지 이어진다.
섬진청류를 지나 벽소령 가는 봄 길에서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줌 이마에 흩날리니
산 아래는 봄이요, 산 위는 아직 떠나지 않은 지난 계절이더라.
연초록 녹음으로 말미암아 봄날의 장관이 따로 없다.
보름날 벽소령에서 유리구슬처럼 밝은 달이 보고 싶었나 보다.
벽소령은 벽소명월(碧宵明月)이라 한다.
지리 10경에 들어갈 정도로 운치가 빼어나다고 하여
나도 기어코 찾아왔다.
마음 흔들거리듯 굽이굽이 골을 거슬러 벽소령에 도착하니
음정에서 벽소령 능선을 넘어가는 바람은 왜 이렇게 차갑게 불어대는지
해질녘 대피소는 벌써부터 바람을 피해 사람들로 북적인다.
성삼재, 음정, 심정 마을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찾은 이들은
이곳 쉼터에서 허기를 달래고 물을 나눠 마시고
작자 삶의 이야기를 풀어 시름을 내려놓는다.
달은 홀로 떠 있고 살아있는 것 조차 죄스러운 달밤
먼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에 이미 하나가 된다.
자연에 취하고 몸이 취히고 마음이 취하는 시간
어느 누가 이 마음 이 뜻을 알겠는가!
바위에 앉아 무심히 달빛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린다.
내일이면 덕평봉을 지날 것이고 선비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지나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세석을 품은 영신봉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지리산 청학의 전설이 깃든 최치원의 발자취를 더듬어 이상향을 바라볼 것이다.
촛대봉 아래 세석평전 어디에서나 연분홍 진달래는 가득할 것이고
나는 꽃내음 산내음 깊게 들이킬 것이다.
세석에서 거림으로 내려서는 길
좌측 높다란 촛대봉의 신령스러움에 고개는 떨구어지고
눈길은 자꾸만 숲으로 향한다.
바람이 비를 모아 사시사철 맑은 물을 가두어 놓는 청학연못을 찾는다.
일상에 지친 육신을 데리고 언제 어느 때고 찾아들면
무량함으로 넉넉히 영혼을 달래주는 산,
이상향의 청학동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한없이 평화롭게 앉아 길게 뻗은 남부능선 끝자락 삼신봉을 바라본다.
숱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 어딘가를 향할 때
다시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쉬어가고 위로받고 시름을 더는 지리....
'행여 견딜만하면 오지 마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시대와 세월을 떠나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지리산에 들어선다.
나 또한 벽소령 달빛을 그립다는 미명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붉은 세석이 보고싶어 지리산에 들었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길인 것처럼 따스한 봄날에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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