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발을 담그는 것만큼 시원한 게 또 있을까? 대지를 떠겁게 달구던 칠월의 한낮, 천진한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물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며 놀던 때가 있었는데 그 칠월 백중을 넘어 그새 구월을 맞이한다. 물론 입추도 훌쩍 넘어 섰으니 한여름의 더위도 이제 한풀 꺽일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고향 집 앞마당 담장을 사이에 두고 짝달막한 키에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려는 듯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는 대추나무가 있다. 아직 푸른빛깔을 간직한 채 여름을 뱉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올해 추석은 유난히 빠르다. 벼의 이삭은 길게 당겨진 활시위 처럼 허리를 굽혀 고개를 떨구었다. 풍년 소식을 황금빛으로 대신하며 대지를 물들이는 중에 우리는 가을에 취해 간다. 사람과 자연이 한대 어울려 서로 얽히고 설켜 나름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들녘의 곡식은 실하게 여물어 고개를 숙이고 백로(白露)가 찾아오는 시기에 농작물에는 흰 이슬이 풀을 적신다.
이른 새벽 나른한 쪽빛의 아침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들인다. 진부하게도 바람이 분다.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바람은 내일도 불어올 것이다. 자연은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만을 따스하게 품어준다. 안개가 자욱한 들녘을 가로질러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우뚝 솟은 산과 마주한다. 맑고 서늘한 새벽기운의 청량한 산 내음을 맡으며 또 이렇게 산과 마주한다. 자연과 함께하는 순응의 시간은 곧 느림의 미학이며 안분지족하는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숲에 들면 눈을 감고 보이지 않은 언어로 숲을 바라본다. 어느 것 하나 생명이지 않은 것 없고 나누지 않은 것은 없다. 부조리 난무한 세상에 내가 나설 곳도 만인의 앞에 당당히 모습 드러낼 용기 조차 없는 처량한 몸이지만, 산들거리는 신선한 초록의 맛을 느껴본다.
여유와 느림, 은은한 가을빛 맴도는 자연에 취하다 보면 지금 마중나가는 가을도 어느새 다음해로 훌쩍 넘어가곤 한다. 오색 창연한 빛이 만산 정상에 가득할 시기, 가을 억새가 보고 싶다. 가을날에 울어대는 탄식은 비명의 쓸쓸함들을 쓸어내리고 가을의 언저리에 고개를 들이밀며 서걱서걱 초가을 매밀꽃 마냥 은은히 고즈넉한 향기를 내뿜는 날에 산에 오르고 싶다. 하얀 날개짓으로 산들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천연의 무량함처럼, 가을 동화의 첫 페이지처럼 내 눈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다.
가을이 오면 / 김용석
나는 꽃이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꽃은 시들고 향기는 바람을 따라 떠났어도
세상 어딘가 머물고 있을 것만 같은 향기로운 날들이
내게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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